2010/02/08 15:29
[복음과 율법]
아래 예화는 설교단에서 많이 사용되는 예화입니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말대로 예화 역시 누가 사용하는가? 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이용됩니다. 성경 역시 그렇습니다. 다음 예화를 한번 읽어 봅시다.
한 살인자가 사형을 선고 받았다고 가정합시다. 형 집행 날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법 아래 있는 것이며, 죄책감 속에서, 정죄함 아래서, 사형 선고하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형이 집행되기 하루 전에, 대통령이 이 죄수의 형편을 재검토하고 난 후, 용서해 주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대통령이 그 정상을 참작하여 자기의 권한을 이용해서 그 죄수를 완전 석방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위의 예화는 구약의 율법 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은혜 아래있는 성도들과 무관한 예화입니다.
이제, 법은 더 이상 그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는 법률의 고소에 대하여 완전히 죄 없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자유로이 걸어나갈 수 있으며 어느 경찰이라도 그를 체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은혜 아래 있고 더는 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마음대로 법률을 깨뜨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대통령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법률을 더 잘 순종할 의무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에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대통령께 대한 감사화 충성의 마음으로 국가의 법을 더욱더 조심스럽게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와 율법에 대한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여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있습니다. 이 성결 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고 해서 율법을 더는 소용없는 것으로 폐할 수 있는가?”라고 우리에게 질문하면서 스스로 대답하기를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는 율법이 세워지고 재강조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범함으로 죄를 짓고 용서 받고, 죄를 짓고 용서받는 반복이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죄수가 사면을 받으면 용서를 받은 마음으로 감사와 더불어 순종할 의무가 생겨서 다시 죄를 안짓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죄를 짓습니다. 오히려 더 자주 쉽게 죄를 짓게 됩니다. 만약 위의 예화대로 된다면 어느 나라 대통령이나 전국의 죄수들을 처벌하는 대신 수시로 사면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사면하면 할 수록 범죄 재발율이 더욱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범죄했을 때 한 두번이 아니라 1,500년 동안 용서와 사면이란 은혜를 입었지만 범죄의 반복이었을 뿐입니다. 사면 받은 자는 법을 존중하게 되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 본성, 죄성, 죄의 권능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거짓말입니다. 이것이 율법 체계의 한계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에게 율법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전역한 군인에게 전역시켜준 국가의 은혜에 감사해서 사회 생활에서는 더욱더 군법을 잘 지키라"는 말과 같습니다. 교사가 졸업한 핵생들에게 사회에서는 더욱더 교칙을 잘 지키라는 말과 같습니다. 풀려난 죄수에게 더욱더 교도소에서 교도관들이 정해준 생활 규칙을 잘 지키라는 것과 같습니다. 사면받은 죄수가 사회에서 교도관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는 제 정신입니까?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 율법에서 구출해 주시고, 해방해 주신 것이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 율법의 행위들을 하라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제 정신입니까? 위의 예화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는 율법이 세워지고 재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율법도 은혜도 모르는 사람의 속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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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예화는 여러분이 자주 들을 수 있는 예화입니다.
그물은 촘촘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잡을 수 없고, 올무는 단단하지 않으면 걸어도 소용없듯이 이단들의 논리 역시 촘촘하고 단단한 것들이 많습니다. 오직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런 올무를 끊어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속도 위반으로 경찰에게 붙들린 경험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법을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여러분은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경찰이 법규위반 보고서를 쓰고 있는 동안, 아마 여러분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매우 급한 사정 때문에 속도 위반을 하게 되었다고 경찰에게 호소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경찰관은 자신이 쓰고 있던 보고서 용지를 천천히 접더니 찢어 버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좋습니다. 이번만큼은 용서해 드리지요. 그러나...” 경찰이 말한 “그러나...”라는 말에는 무슨 뜻이 내포되어 있을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그러나 다시는 속도 위반하면 안됩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요.율법은 위의 예화에 나온 교통 경찰처럼 결코 긍흉을 베풀지 않습니다. 율법은 긍휼과 용서가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위의 예화에 나온 경찰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합니다. 복음은 운전자의 잘못을 자신이 담당하고 벌금도 내 줍니다. 율법과 복음은 본질상 이렇게 다릅니다. 율법은 운전자의 상태, 성격, 자질, 능력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교통법 준수를 강요합니다. 복음은 운전자의 상태를 압니다. 그는 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임을 잘 압니다. 복음은 자신이 범법한 운전자 대신 처벌을 받고 벌금을 내 준 후에 '이후로 다시는 법을 어기지 말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경찰의 이러한 용서(은혜)가 여러분에게 법을 불순종해도 좋다는 길을 열어 줍니까? 아니면 그와 반대로 다시는 법을 어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마음을 변화시켜 줍니까? 물론, 그 경찰관의 자비로운 용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회개의 정신을 깊이 새겨 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마련된 은혜 때문에 죄를 용서 받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는 은혜 아래 있으니 더 이상 십계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위의 예화를 사용한 율법주의자는 복음이 그렇게 말한다고 상상합니다. 자신의 추측과 상상을 성경적 교리처럼 가르칩니다. 복음과 은혜가 무엇인지 반쪽만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범법한 운전자를 향해 "이제는 법을 지키며 운전하라가 아니라 다시는 네가 운전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법을 어김으로 받을 벌도 내가 받고 네가 법을 지켜야 할 일도 내가 해 주겠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평생 운전하지 않는 사람은 교통 위반 티켓을 신경 쓸 일도 없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아예 법을 어김으로 벌을 받을 일도 없고 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될 일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참된 복음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성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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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예화는 정말 유명한 예화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복음의 은혜를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예화는 설교의 창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 그럼 한 번 읽어 보십시오.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순종의 삶을 살게 되는 이유위의 은혜로운 주인은 노예 시장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그러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완벽합니다. 주인이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면 풀려난 노예는 2-3일도 안되어서 다른 노예 주인에게 붙들려 다시 노예 시장으로 팔려 갈 것입니다. 주인없는 노예를 가만히 둘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은혜로운 주인은 매번 노예 시장에 가서 그 노예를 샀다가 풀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래 전에 미국 뉴올린즈 노예 시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은혜와 율법의 관계에 대한 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두 명의 목화밭 주인들이 반항적인 음성으로 소리지르고 있는 어떤 쓸모없는 흑인 노예를 노예 시장에서 경매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한 농장 주인이 경매에 이겨서 그 노예를 마차에 태우고 농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동안, 그 흑인 노예는 반항적인 말투로 새 주인을 위하여 일하지 않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농장에 도착하는 순간, 그 주인은 새로 산 노예의 손에서 사슬을 풀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자유요. 당신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오. 나는 당신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비싼 값을 치르고 당신을 사 온 것이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흑인 노예는 농장 주인의 발 밑에 엎드려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주인님! 나는 당신의 명령을 순종하면서 영원토록 섬기기 원합니다.”
그 흑인 노예와 같이, 인류도 죄의 속박과 정죄와 죽음 가운데 노예로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희망 없는 노예 상태로 있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주님껫 큰 희생을 치르신 것은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구속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나를 위하여 이렇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제부터 내 평생 동안 당신만을 충성스럽게 섬기겠습니다.”
노예를 값을 치르고 사서 자유를 주실 뿐 아니라 다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도록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신분을 전환해 주십니다. 아예 자신의 상속자로 삼아 버림으로써 법적 지위도 부여 해 주십니다. 이제는 누구도 그가 과거에 하찮은 노예였다고 함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자, 그럼 노예에서 아들이 된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인님"이 아니라 "아바, 아버지"하고 불러야 합니다. 노예법에 매여 주인을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유의 법에 따라 아버지를 섬겨야" 합니다. 만약 아들이 된 노예가 여전히 '종으로서 주인 섬기듯' 한다면 그는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너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아들이란다."고 말해 줄 것입니다. "제가 노예였다가 이제 은혜로 아들이 되었으니 이후로는 주인님이 노예들에게 정해 준 노예법을 더 잘 지키겠습니다! 순종이 주인님의 뜻인 줄로 압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에게 자유를 주시고, 아들로 삼아준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더욱더 종의 법을 잘 지키자고 외치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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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예화는 많은 복음 전도지에도 자주 나오는 그런 예화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를 잘 설명해 주는 좋은 예화가 됩니다. 아버지는 판사였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아들이 법을 범한 죄수로서 판사인 아버지 앞에 끌려왔습니다. 나타난 모든 증거들을 볼 때, 자기 아들은 분명히 유죄였습니다. 법정 안에는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판사가 이러한 경우에도 공정하고 의로운 재판을 할 수 있을까? 판사는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엄숙하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리고는 법에 따라서 최고의 벌금형을 부과했을 때에 법정 안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판사는 즉시로 내려와서 아들을 끌어안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너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러나 너에게는 그렇게 많은 벌금을 낼 만한 돈이 없지?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를 대신하여 모든 벌금을 갚아 줄게.”위의 예화는 율법의 공의와 긍휼의 조화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예화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율법의 공의와 죄인을 향한 사랑을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을 다 청산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친히 다 해 주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은혜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받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럼 율법주의자들은 이 예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입니까? "용서 받은 아들이 이후로는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간교한 속임수입니다. 구원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네 힘으로 네가 직접 빚 다 갚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갚으신 것은 무효로 하자는 것입니다. 주님이 해 주신 일을 무효화하고 네가 다시 다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의 복음이 아니면 무엇이 저주의 복음입니까? 안식교, 메시아닉, 몰몬교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바로 저주의 복음입니다.
메시아닉 유대인, 율법주의자들: 의인(구원받은 성도)은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성경 신자들 :의인(구원받은 성도)은 믿음으로 살리라.
성경 신자들 :의인(구원받은 성도)은 믿음으로 살리라.
누가 맞습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당연히 성경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합니다.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 받아 의롭게 되었다면 이제 의롭게 된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똑같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 갈3:11, 히10:38).
위의 예화와 달리 아버지는 용서받은 아들에게 "너는 비록 나의 도움으로 용서 받았지만 죄수들에게 준 공의로운 법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 재판 받기 전까지 형사들과 교도관이 가르쳐 준 규칙들을 잘 숙지해서 그대로 행동하기 바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네가 체포된 후 지금까지 받았던 훈육들을 잊지 말아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재판자의 사면의 판결과 동시에 그는 이전에 자신을 구속하던 모든 법규들, 자신을 감독하던 경찰, 교도관들로부터 자유를 얻고 신경조차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본질, 성격, 역할, 대상이 모두 다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율법에서 해방된 자들에게 U TURN해서 율법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사람들의 가르침이지 주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런 속임수에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Written by Pastor. Yoon
AV1611-THE WORD MINI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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